- 펄 벅과 첫 만남 -

글 속에서 펄 벅을 만난 것은 사춘기적 학창시절 '대지'를 읽으면서였다. 그 시절은 고전문학에 대한 정서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책을 섭렵했는지, 적어도 누구의 무슨 책 정도는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했었다.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 선생님은 수업시간 막간에 책 이야기를 하시며 교과 외의 질문을 종종 하셨다. 그런 선생님의 질문에 누구보다도 먼저 대답을 했을 때 교양인이 된 듯이 뿌듯했던 경험들이 있다. 그런 뿌듯함으로 두껍고 쉽지 않았던 고전문학을 읽어보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 당시 읽었던 '대지'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오란이 장족을 하지 않아 커다란 자신의 발을 남편 왕룽 앞에서 부끄러워하던 장면, 메뚜기 떼가 벌판을 휩쓸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바람이 몹시 세게 불어 문이 거세게 닫혔음에도 딸아이가 놀라기는커녕 방긋방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자신의 딸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들 정도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펄 벅, 자라지 않는 아이).”

- 펄 벅과 두 번째 만남 -

나는 30대 초반에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을 수 있는 살아갈 날들에 대해,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덜 초라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둘도 없이 예쁜 내 딸아이의 장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흑 같던 30대를 지나 41살에 특수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내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그때가 가장 가슴 뛰고 흥분되었던 순간으로 생각된다.
사춘기 학창시절 이후 펄 벅을 다시 만난 것은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2년 차 접어들었을 때이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두껍지도 그렇다고 얇다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책이었다. 그것도 펄 벅이 쓴 책이었다.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하고, 덜 초라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서 처음 내디딘 발걸음에 기쁨으로 넘쳐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바로 새 책을 샀다. 그리고 다시 읽고 또 읽었다. 펄 벅의 자전적인 글이었다. 나와 같은 길을 앞서 걸어간 사람이 쓴 책, 나와 같은 사람이 읽기를 바라고 쓴 책을 보면서 펄 벅이 내게 준 선물로 생각되었다. 펄 벅의 질문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아이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와 같은 삶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 책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었다. 펄 벅을 만나면서 자신을 뛰어넘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움을 보았다. 내 인생의 멘토가 필요했던 가장 적절한 시기에 펄 벅의 ‘자라지 않는 아이’가 그렇게 내게로 왔다.

“떨쳐버릴 수 없는 슬픔을 인내하는 법은 혼자서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억눌린 슬픔은 씁쓰름한 뿌리처럼 삶에 박혀서 사람을 병들고 우울하게 하는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고,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슬픔은 지혜로 모양을 바꿀 수 있고, 지혜는 기쁨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행복은 줄 수 있다. (펄 벅, 자라지 않는 아이).”

- 펄 벅과 세 번째 만남 -

부모님이 선교사로 중국에 가게 되어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자란 펄 벅은 선교 활동을 위해 중국에 온 젊은 농경제학자 존 로싱 벅을 만나 결혼했고, 딸 캐롤을 낳았다. 펄 벅은 출산과정에서 발견된 종양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캐롤은 오늘날에는 치료법이 알려진 ※PKU(페닐케톤뇨증)로 지적장애를 갖게 되었다. 펄 벅은 캐롤을 키우기 위해 중국을 떠날 수 없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 나는 젊고, 건강하고, 교육도 받았다. 이 세 가지를 발판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
펄 벅은 그녀가 보아왔던 살아가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런 절박함으로 집필활동에 전념한 펄 벅은 최초로 퓰리처상(1932년)과 노벨문학상(1938년)을 둘 다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펄 벅은 1892년에 태어났다. 1920년에 캐롤을 낳았고, 이 책은 1950년에 출판되었다. 삶을 어느 정도는 관조할 수 있는 58세의 나이에 사회통념 상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딸 캐롤의 존재와 캐롤의 양육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하며 개척한 30년 삶의 고뇌를 훌륭한 필력으로 써 내려갔으니, 내게는 이보다 더 위로되는 것이 없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 책을 다시 정독했다. 52세에 23세의 딸을 둔 엄마로서 지니(가명, 필자의 딸)와 함께 살아온 삶의 체험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면서 같은 삶을 먼저 지나간 부모가 쓴 절절한 표현 하나하나에 다시 줄 긋고 꼬리표를 붙이면서 처음과 두 번째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행간의 느낌들을 되새기며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진지하게 짚어보았다.

※PKU(페닐케톤뇨증)는 신생아에게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여 체내에 페닐알라닌이 축적되어 그 결과 지적장애를 일으키는 선천성 대사 장애로 오늘날에는 출생 직후 혈액검사로 바로 진단할 수 있으며 페닐알라닌 제거 분유를 기본으로 하는 식이요법으로 장애를 막을 수 있다.

정은미 교육학 박사 /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  jem9123@naver.com

<저작권자 © 강원종합복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