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가명, 필자의 자녀)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G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장애학생 어울림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름 방학 중 진행되는 캠프였으므로 사전 모임을 통하여 프로그램을 위탁받은 G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지니의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특성화고등학교의 디지털디자인과에 다니고 있다고 하니 H 대학교에 가면 되겠다고 하셨다. 같은 학과가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마침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전공 관련 자격증을 지니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9월에 시작되는 수시 전형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H 대학교는 교명이 바뀌어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였을 때, 다른 학교가 검색되는 등, 그동안 나의 탐색을 빗겨나 있었다.

지니는 6세에 정신지체(지적장애) 3급, 14세 발달장애 3급, 16세 자폐성 장애 3급으로 최종 장애판정을 받았다. 우여곡절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과 학교생활 적응을 비교적 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장애가 어떤 양상으로 펼쳐지는지를 알고 싶고, 지니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걸고 지니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특수교육현장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지니의 진로를 앞에 두고 무색해졌다.

장애아의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에 망연해하고, 24시간을 아이에게 매달려 허덕이고, 학령기에 접어든 아이가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가에 불안, 초초해 하다가 잠시 안도하는 와중에 도대체 정지되어 꿈쩍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훌쩍 지나가 어느새 지니가 성인기의 문턱에 와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스스로 열심히 탐색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장애라는 경계에 갇혀 있어 앞날을 예측하며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정보도, 선험자도, 안내자도, 갈 곳도 없는 총체적 난국을 그대로 눈앞에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12년 고등학교 3학년 학기 초 담임선생님과 탐색해 본 진로는 지역사회 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실을 거쳐 제과제빵 실에 취업하기,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대학교 진학, 수도권 2개 정도의 대학교 바리스타과, 도예과 정도였다.

특수교사가 되어 현장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장애 학생들이 진학한다는 몇몇 학교를 알고는 있었으나 세세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나의 활동영역인 발달장애인 대상 특수학교에서는 대학진학생을 본 적이 없었으며, ※발달장애인의 고등교육(대학진학)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상태에서 얻어진 지니의 대학입학은 활동영역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부딪히며 얻어진 극적인 결과로 볼 수밖에 없었다.

2013년 대학교 1학년이었던 7월 A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술동호회 그룹전시회에 참여하였다. 화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선배들과 함께하는 동호회였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시던 K 교수님의 말씀처럼 지니는 그리기를 좋아해서 그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역사회에는 취미 활동을 하는 동호인들이 많이 있다. ‘빛 그리고 색’ 미술동호회는 A 시의 자생적인 동호회였으며, 1996년부터 매년 1~2회의 전시를 기획하여 지니가 처음 참여할 때는 22회째를 맞이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호회였다. 중년 이후의 연륜을 가진 회원들은 지니가 참여하여 활동하는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시고 함께 해주시며 격려해주셨다. 지니가 참여한 첫해 전시회에서 지니 바로 위 선배는 52세 언니였다. 자연스럽게 지니는 지역사회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전시회를 할 때 지니가 다니고 있는 H 대학교 총장님을 비롯한 학과 교수님께 지니 자필로 봉투에 주소를 쓰고 전시회 도록에 지니의 명함을 끼워 등기우편으로 보냈으며,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지니를 아는 지인들께도 보냈다. 첫 전시회를 마치고 얼마 후 G 시에 있는 장애인표준사업장 (주)아난 대표님이 나의 SNS에 올라와 있는 전시 그림들을 보았다며 회사에 걸어두고 싶으니 그림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제는 아마추어가 아니어서 작품은 판매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쾌히 2점을 구매하겠다고 하였다.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용기 내어 한 말이었는데, 내가 당황했다. 그림값을 얼마로 정해야 하는지 고민을 안게 되었다.

첫해 지니의 전시작품 주제는 ‘나의 꿈’이었다. 캐릭터 그리는 것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지니의 기호를 고려하여 유화물감과 아크릴 물감을 적절히 사용하여 지니가 표현하고자 하는 캐릭터를 ‘꿈’의 표상인 붓에 표현하였다.

2014년에도 동호회원과 함께한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에게 지니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였다. 2013년 9월부터 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낮에는 학교근무를 하고, 주 3~4회 야간에 강의를 들어야 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니의 생활에 깊숙이 개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화실 선생님의 지도와 회원들의 배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동호회원들은 활동을 통하여 알게 된 회원이거나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들로 지니와 함께 생활하며 잘 안내해주었다.

120여 명 직원 중에 발달장애인을 포함하여 50%가 넘는 수의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는 장애인표준사업장 ㈜아난 대표는 지니 그림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회사에 꼭 걸어두고 비슷한 또래의 발달장애 직원을 비롯한 모든 회사원에게 보여주고 싶으시다며 2014년 전시회 첫날 직접 관람하시고 2013년에 이어 그림 2점을 구매하였다. 2016년 1월 새로 확장하여 이전한 ㈜아난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걸려 있는 지니의 그림 4점을 보았다.

㈜A에 걸려있는 지니의 작품들 1

㈜A에 걸려있는 지니의 작품들 2

장애인표준사업장 ㈜ 아난의 작업장 일부 전경

장애인표준사업장 ㈜아난

오랜 시간 지속해서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화가를 목표로 두고 추진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지니가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스로 치유가 되는 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017년에도 지니는 5회 연속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이번 작품 주제는 ‘여행의 기억’으로 정하였다. 여행하면서 직접 스마트폰에 담았던 장면들을 화폭에 되살려 내었다.

※장애인의 고등교육 : 우리나라는 1995년 장애인 대학입학 특별전형제도가 시행되었다. 현재 발달장애인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은 크게 4가지 유형이 있다.
1. 2002년에 개교한 한국재활복지대학(現 국립한국복지대학교)은 장애인의 고등교육 수준의 직업교육 기회 제공을 통한 전문인력양성과 통합교육실현이라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2. 2009년 신설된 나사렛대학교 재활자립 학부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규대학과정으로 운영된다.
3. 대학 내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으로 대구대 K-PACE(2011년~),
4.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성분도 대학(2009~), 호산나 대학(2006~)이 있다.

정은미 교육학 박사/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  webmaster@gwelfa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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